NEWS
[성폭력 신고] 성범죄 피해자인데, 신고는 너무 힘들 것 같아요
피해자의 입장에서 신고를 망설이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앞으로의 과정이 겁나기 때문이다.
일단 오랜 시간 경찰서와 법원에 불려다녀야 할 것 같고, 역으로 내가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도 된다.
성범죄는 지인이 가해자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관련된 다른 사람들하고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직장 내 성범죄면 커리어를 걸어야 한다. '내가 한 번 참으면 없는 일인데'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피해자들이 가장 많이 듣는 조언은 참고 넘어가라는 것이다.
실제로 각종 성폭력 상담기관에서 이런 조언을 해주는 경우가 많다.
신고를 하고나면 지금보다 힘든 일이 많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식이다.
심지어 고소절차가 얼마나 힘든지 피해자에게 겁을 줘서 신고를 막기도 한다.
"힘든 것은 피해자 본인도 안다"
그런데, 피해자들이 앞으로 힘들 것을 몰라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 본인이야말로 그냥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게 안 되니까 전문가를 찾는 것이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불쑥불쑥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고, 길에서 가해자와 닮은 사람만 봐도 심장이 내려앉고, 불면증에 시달린다.
나는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데, 가해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복한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절박한 마음으로 전문가를 찾아오는 피해자에게 잊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하는 것은 전문가로서 무책임한 일이다.
이 정도 조언은 가족이나 주변 친구들도 해줄 수 있다.
전문가는 피해자에게 예상되는 법적 절차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피해자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증거가 없어서 불리하다는 막연한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다.
보충할 수 있는 간접증거는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 어떤 부분을 어필하면 승소 가능성을 최대한 높일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이게 진정한 전문가의 일이다.
"피해자는 약하지 않다"
사람들은 성폭력 피해자라고 하면 무기력하게 실의에 빠진 연약한 사람을 떠올린다.
그러나 내가 만나 온 실제 피해자들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
오히려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도 고소를 고민할 만큼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피해자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정보다.
내 사건의 승소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지, 법적으로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그리고 정확히 어떤 절차가 진행되고 구체적으로 무엇이 힘든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고소를 할지, 아니면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을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피해자 변호사는 사건을 최대한 정확하게 분석해주고, 절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는 변호사다.
법적인 절차가 힘든 것은 맞다. 참고 넘어가는 것보다는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법적인 절차를 잘 이해하고, 철저히 준비해서 시작하면 충분히 견뎌낼 만한 일이다.
"고소 자체가 마음의 위로를 받는 방법이다"
내가 힘든 만큼 가해자도 똑같이 힘들다.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패소하면 형사처벌을 받고 성범죄자가 되는 일이다.
당연히 무섭고, 돈을 써서 변호사도 선임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형사고소는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을 가해자에게 조금이라도 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법적인 절차를 통해 본인이 마음의 위로를 받는 경우도 많다.
치열한 싸움 끝에 결국 패소를 하더라도 어쨌든 참지 않고 강경하게 대응을 해봤다는 것,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것, 그리고 끝을 봤다는 것이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 같다.
무혐의가 나오거나 무죄가 나와서 패소했을 때 변호사로서 의뢰인에게 결과를 이야기할 때면 마음이 너무 아픈데,
의뢰인이 변호사인 나보다도 결과를 더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고소하지 말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분들은 의외로 드물다.
끝까지 싸워볼 수 있어서 후련했다, 변호사님과 함께여서 버틸수 있었다면서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고
앞으로 또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싸워나갈 힘을 얻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