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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피해자 전문 변호사의 필요성
성범죄 고소대리를 진행하다보면 의뢰인들께 종종 듣는 말이 있습니다.
"왜 피해자를 위한 로펌은 없고, 피해자를 위한 카페는 없나요?"
"왜 인터넷에는 '강간, 무죄로 만들어드립니다'따위의 광고만 많고, 가해자를 엄벌해주겠다는 광고는 없나요?"
보통 가해자측은 형량을 줄이기 위해 대부분 변호사를 선임하는 반면,
피해자측은(개인적으론 'survivor'라는 영어식 표현을 더 선호합니다) 변호사 없이도 고소가 가능하고
국선변호인 또는 여러 여성단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시장이 작다고 생각해서가 아닐까요- 라고 대답을 드리긴 합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 분야의 변호활동을 하며 느낀 점은
피해자, 특히 성범죄 피해자들이야말로 자신만을 변호해줄 '전담'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변호사를 통한 초기 대응의 중요성]
대다수의 사람들은 형사사건 또한 소송이라는 점을 간과합니다.
그러나 형사사건 또한 범죄의 증명에 이르는, 엄연한 소송입니다.
전략적으로 자기의 주장에 들어맞는 증거를 수집 및 제출해 주장을 관철하는 민사소송과 같이,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위해서는 형사사건에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성범죄사건은 명백한 물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수사기관과 법원은 피해자를 비롯한 당사자 및 목격자들의 진술과 행위 당시의 정황 등 간접증거를 토대로 사건을 판단하게 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피해자의 진술입니다.
범행을 온전히 경험한, 가장 유력한 참고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사기관이 맹목적으로 피해자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특히 성범죄의 경우, 일단 피해자부터 의심하거나 성의없는 태도로 2차 피해를 가하는 경우도 즐비합니다.
따라서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위해서는
성범죄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사실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통해 적극적으로 수사기관을 설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의 프레임 싸움인 이 소송에서 고무적인 것은,
피해자에게 이 프레임을 선점할 권리가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형사사건은 일반적으로 피해자 또는 목격자가 수사기관에 범행사실을 신고하면서 시작됩니다.
이후 피해자가 경찰조사를 받고, 고소장을 제출하는 등으로 사건이 진행되는데,
이 과정에서 반드시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먼저 수사기관에 자신의 주장을 할 기회를 얻습니다.
피해자의 피해사실을 들어보지도 않고 가해자를 조사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피해자는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자신의 피해사실을 명확하게 진술해 수사기관으로 하여금
'일단 이러한 사건이 발생했구나'라는 사실을 인지한 상태에서 수사를 시작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피해자의 주장이 진실이라는 일종의 선입견을 갖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입견은 수사의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기본적으로 피의자 신문시 질의 내용부터가 달라지지요.
예리한 유도신문은 피의자로 하여금 종종 실언이나 자기모순 진술을 하게 하며, 한 번의 실수는 반복적인 실수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수사진행은 피의자 진술의 신빙성을 급격하게 떨어뜨리는 한편, 피해자 진술에 힘을 실어줍니다.
가해자는 수사 초기부터 변호인 입회 하에 조사받으며 두꺼운 의견서를 제출하는데
왜 피해자는 빈약한 고소장을 제출하고, 홀로 조사받으며, 지친 심신으로 인해 중언부언하다 진실성에 의심을 받아야 합니까.
[변호사를 통한 합의의 필요성]
성범죄 사건의 피의자는 변호인을 통해 십중팔구 합의를 제안해옵니다.
성범죄의 특성상 합의 여부가 사건 진행은 물론 양형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도 합의금은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피해 회복에 이르는 현실적인 보상의 두 축이 가해자 처벌과 합의금이기 때문이지요.
완강한 처벌 의사를 고수하지 않는 한, 성범죄 피해자에게 합의금 협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협상의 핵심은 상대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현재 사건이 어떤 단계에 있는지(기소 전 단계인지, 재판 단계인지 등),
확보된 증거는 어떤 것이 있으며 예상되는 처벌은 어떠한지,
가해자의 양형인자가 어떠하며 사회적 지위는 어떠한지 등
가해자가 처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최대한의 금액을 도출해내야 합니다.
피해자가 위와 같은 협상에 홀로 임하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고소장의 작성부터 함께하여 전체 사건 진행의 흐름을 꿰고 있는 변호사만이 피해자에게 최선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부디 "이 정도면 많이 받는 거예요.", "돈이라도 받아야지 남는 거 돈밖에 없어요." 따위의 말로 인해
터무니없는 금액에 합의하는 피해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합의금의 많고 적음이 피해자가 받은 상처의 치유 여부를 가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좋은 변호사의 노력이 피해자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피해자 변호사의 역할]
많은 변호사들이 피해자 변호사의 역할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과거의 고소대리와 같이 고소장을 대신 작성해주는 정도의 역할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설시한 바와 같이 형사사건 또한 엄연한 소송이고,
피해자 변호사의 역할은 사건 진행의 '전 과정'에서 피해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역할이 단순한 고소장 작성에 그칠 리 만무합니다.
성범죄 사건의 특성상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 관계자의 진술, 즉 말입니다.
말은 끊임없이 엇갈립니다. 그리고 수사기관과 법원은 엇갈리는 말 속에서 진실을 찾아다니지요.
그러나 생각보다 피해자에게 말할 기회는 많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형사사건에서 피해자는 엄격한 의미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검사 vs 가해자의 구도)
그럼 피해자의 자신의 말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요?
이것이 바로 피해자 변호사의 역할입니다.
지속적으로 사건 진행 상황 및 가해자의 새로운 주장을 파악하고,
적절한 때에 의견서를 통해 피해자측 주장을 전달하여 사건이 가해자에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 예로,
피해자가 유리한 증거를 새롭게 발견했는데 이게 왜 중요한 증거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단순히 전달하는 데 그쳐 수사기관이 이를 간과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해당 증거가 사건의 전체적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했다면 좀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빈약한 고소장을 제출하고 가진 증거 자료를 십분 활용하지 못하여 가해자가 무혐의 처분을 받은 뒤 찾아오시는 의뢰인들이 계십니다.
막상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 잘 모른 채 수사기관에서 네, 네라는 대답만 반복했고
가해자 측은 사선 변호인을 선임해 거짓 진술로 빠져나간 것이 너무나 억울하다는 것이 공통된 내용입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한 번 검찰에서 무혐의 받은 사건에 대한 항고 또는 재정신청이 인용될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처음부터 함께 고소장을 작성하고 대처했더라면 이 고통 속에 피해자만이 남아있지는 않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가장 크게 드는 순간입니다.
가해자가 형사입건도 되기 전부터 판결이 확정되는 순간까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갖는 것처럼,
피해자 또한 가해자의 처벌이 이루어지는 순간까지 변호사와 함께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피해자의 역할이 단순히 눈물젖은 탄원서를 제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혐의 입증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사건의 실질적 당사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피해 회복은 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