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순백의 피해자일 필요 없어요
"피해자 잘못이 아니에요"
피해자 변호사로서 가장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부분은, 성범죄 피해자분들이 너무 혹독하게 '자기검열'을 하고, 또 스스로를 자책한다는 점입니다. 피해자 입장이 되면 나한테 불리한 증거부터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아요. 나한테 불리한 증거 아닐까, 이거 때문에 내가 지면 어쩌지, 가해자가 무고죄로 맞고소하면 어떡하지. 그때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모텔에 따라간 내 책임이라고 하면 어떡하지.
피해자분들이 이런 생각부터 하게 되는 것은 우리 사회 탓입니다. 우리 사회가 성범죄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사실 잘못은 다 범죄자가 한 것인데도, 유독 성범죄라고 하면 피해자도 원인 제공을 한 것처럼 취급해요. 제가 정말 많은 성범죄 사건을 지켜본 변호사로서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데, 이 세상에 피해자가 잘못해서 일어난 성범죄는 없습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이길 수 있어요"
우리나라 법이 성범죄 피해자에게 냉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피해자의 마음을 최대한 이해해주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법이 무작정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건 과거의 이야기예요. 불과 10년 전하고만 비교해도, 판사님들의 성인지감수성이 평균적으로 정말 많이 높아졌습니다. 요즘은 일하면서 정말 감탄이 나오는 판결문도 많이 받아봅니다. 물론 여전히 잘못된 판결도 있지만, 지금도 성범죄 피해자 편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판사, 검사님들, 경찰 수사관님들 덕분에 분명히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좋은 경찰 수사관님들이 정말 많습니다. 사실 주변에서든, 인터넷에서든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경찰이 오히려 가해자편을 들더라, 피해자 말을 의심하더라 이런 이야기요. 사실 현장에는 좋은 수사관님들이 훨씬 많습니다. 성범죄 피해자 입장에서 공감해 주시고, 이야기 자세히 들어 주시고, 피해자를 격려하고 위로해 주시고, 가해자 열심히 조사하겠다고 약속해 주시고 이런 수사관님들 덕분에 저도 같이 위로받고 옵니다. 유포 못 하게 해야 된다고 가해자 집 앞에서 밤새 잠복해서 압수수색 해주시고, 직접 가해자 혼내주시고 이런 열정적인 수사관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한테 조금 불리한 부분이 있더라도 법적으로 이해받을 수 있습니다. 조사받을 때 잘 설명하면 됩니다. 가해자가 무서워서 요구하는 대로 따라줬더라도, 그때는 헤어지기가 힘들어서 더 연락하고 만났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날은 내가 자제 좀 못 하고 술을 많이 마셨더라도, 안 건드린다는 가해자 말에 속아서 모텔에 갔더라도 괜찮습니다. 그깟 처신 좀 잘못 했어도 됩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이렇게 행동했는지 사실대로 이야기해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조금 피해자답지 않아도, 조금 과격하고 덜 슬퍼보이는 피해자여도 괜찮습니다. 법을 잘 모르는 주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휘둘려서 스스로를 검열하고 자책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당당해지세요. 내가 아니라 법이 잘못된 겁니다."
성범죄 가해자들은 피해자와 반대로 본인한테 유리한 증거부터 찾습니다. 뻔히 증거가 있는데 자기는 인정을 못 하겠답니다. 그러면서 별 의미도 없는 피해자 말 한 마디를 가지고 꼬투리를 잡아요. 끝까지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구요. 이런 사람들은 결국 구속을 당해야 자기가 잘못했다면서 말을 바꿉니다.
이게 제가 가장 화나는 점입니다. 성범죄 가해자들은 이렇게 쉽게 거짓말을 합니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인데도 변명으로 받아주고, 거짓말을 하다 걸려도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가줍니다. 성범죄 피해자들은 거짓말은커녕 신고를 하는 그 순간에도 자기가 처신을 잘못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닌가 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자책하는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 자신을 너무 엄격하게 대하지 않아도 됩니다. 성범죄 피해자들은 더 당당해져야 합니다. 그 모습을 법의 영역에서 이해하는 건 법의 역할이고 책임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나한테 손가락질 해도 나는 나를 이해해줘야 해요. 내가 결국 신고를 하지 않더라도, 신고를 했다가 패소하더라도 가해자가 가해자고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