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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변호사가 알려주는 성범죄 증거수집 (2) - 일기(다이어리) 편
이제 막 성범죄 피해를 입었습니다. 당장 신고를 해야 할지 아니면 가해자하고 이야기를 먼저 해봐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변호사 상담을 받아봐야 할지 너무 혼란스러운 상황이에요. 시간은 계속 가는데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증거도 점점 없어지고 내가 불리해질 것 같아요. 어떻게든 증거를 남겨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증거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일기(다이어리)를 쓰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피해사실 기록'이죠. 내가 겪은 일을 내 기억이 가장 생생한 지금 글로 기록해놓는 것입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수사기관과 법원에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 피해자의 일기를 중요한 증거로 보기 때문입니다.
수사기관과 법원은 항상 피해자의 말을 의심합니다. 특히 성범죄는 피해자가 곧바로 신고를 하지 않고 고민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고소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해자가 그 사이에 거짓말을 지어낸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합니다. 그래서 사건 직후에 피해자가 직접 쓴 일기로 의심을 없애주는 겁니다. 사건 직후에 쓴 일기 내용하고 경찰조사를 받을 때 피해자가 진술하는 내용이 일치하면, 피해자가 뒤늦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니까요.
사건 당일이나 며칠 안에 쓸 수 있으면 가장 좋고, 고소가 많이 늦어진 경우에는 2~3개월 정도 후에 쓴 일기도 증거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능한 한 빨리 쓴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일기는 성범죄 피해자의 증거수집 방법 중에서 가장 간편하게,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카카오톡 내게쓰기에, 최대한 자세하게"
그럼 일기를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까요. 정답은 쓰는 날짜가 전자적으로 기록되는 전자장치에, 디테일한 부분을 살려서 최대한 자세하게 쓰는 겁니다.
가끔 제가 일기를 쓰라고 했다고 정말로 종이 일기장에 쓰시는 분들이 있어요. 안 됩니다. 종이에 쓰는 일기는 언제든지 날짜를 조작할 수 있잖아요. 내가 피해를 입은 날부터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일기를 썼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인데, 날짜 조작이 가능하면 경찰은 당연히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이어리 어플처럼 언제 썼는지가 어플상으로 기록이 되고 날짜 편집도 불가능한 것을 이용해야 합니다. 제가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카카오톡 내게쓰기(내 프로필)가 가장 좋습니다. 간편하게 쓸 수 있고, 보낸 날짜 그대로 나오고, 내용 수정도 불가능해서 피해사실 기록용으로 안성맞춤입니다. 다 쓰고나서 혹시 날아가지 않게 스크린샷도 하나 찍어놓으세요.
단답으로 '오늘 성추행을 당했다', 몇 줄 쓰고 마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도 안 됩니다. 그럼 일기를 쓰는 의미가 없어요.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가해자의 행동, 내 기분과 생각, 가구 배치, 물건의 생김새, 벽지 색깔까지 시간 순서대로 디테일한 부분까지 써야 합니다. 그날의 모든 기억을 글로 남긴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영화 시나리오를 쓴다고 생각하고 가능한 모든 내용을 글로 써보는 겁니다.
내가 법을 잘 몰라서 불리한 내용까지 써버리면 어떡하나 생각하실 수 있는데, 그럼 나중에 고소할 때 경찰에 증거 제출을 안 해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무조건 써보는 겁니다. 이걸 증거로 쓸지 안 쓸지는 나중에 변호사한테 물어보면 되는 거예요.
"내 기억을 남긴다는 의미도 있어요"
아무리 충격적인 일이어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조금은 흐려집니다. 누구나 그래요. 그래서 일기를 쓰는 건 내 기억을 저장해놓는 의미도 있습니다. 성범죄는 피해자의 진술이 가장 중요한 증거인데, 내 기억이 흐려지면 증거도 사라지는 거니까요.
사실 피해사실을 기록한다는 게 피해자 입장에서 정말 힘든 일입니다. 제일 힘든 순간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려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꾹 참고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나중에 고소를 하든 하지 않든, 일단 증거는 남겨놔야 선택을 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피해자 경찰조사에 가면 어차피 다시 기억을 떠올려서 진술해야 합니다. 실제로 제 의뢰인들 경찰조사 진술대비를 할 때도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피해사실을 기록하는 게 가장 먼저예요. 그러니까 딱 한 번만 꾹 참고 내 기억을 써보는 것, 잊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