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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변호사가 알려주는 성추행 기준
성추행 기준이 뭐냐는 질문에 법적으로 가장 정확한 답은, '피해자 본인이 기분이 나쁘고 불쾌했으면 성추행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실제 피해자분들은 이 말에 공감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겪는 성추행은 아주 교묘하기 때문이에요. 가해자가 가슴이나 엉덩이처럼 성적인 부위를 대놓고 만졌다면 더 따져볼 것도 없겠지요. 그러나 은근슬쩍 어깨나 허벅지에 손을 올려놓고, 팔뚝을 살짝 꼬집듯이 만지고, 속옷 라인을 만지작대는 경우, 가해자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굴고 문제 삼으면 나만 예민한 사람이 될 것 같은 상황에서는 기분은 나쁘고 불쾌하지만 내가 성추행을 당한 것이 맞나? 의심스러운 것이 당연합니다. 일 크게 만드느니 조용히 넘어가고 싶기도 하구요.
그러니까 성추행이 맞냐, 성추행 기준이 뭐냐고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가해자가 손을 댔고, 내가 기분이 나쁘고 불쾌했으면 무조건 성추행입니다. 중요한 건 이게 성추행이 맞냐 아니냐가 아니라, 피해자가 어떻게 대처를 하는지입니다.
"먼저 경고를 해놓으세요"
실제로 고소를 했을 때 가해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변명은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라는 것입니다. 만진 것은 맞지만 성적인 의도는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성범죄 공화국인 우리나라에서는 가해자들의 이런 주장을 아주 관대하게 받아줍니다.
그래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가해자에게 선제적으로 경고를 해놓는 것입니다. 내가 싫다고 분명히 말을 했는데 가해자가 무시하고 계속 만졌다면, 그때는 아무리 가해자가 변명을 해도 성추행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상식적으로 피해자가 먼저 경고를 했는데도 싫어할 줄 몰랐다고 변명하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에게 이야기해서 '목격'을 부탁하세요"
가해자가 친구면 모를까 먼저 경고를 한다는 것은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직장상사나 업무상 고객, 교수님처럼 가해자가 나보다 지위가 높아서 내가 거부하고 화를 낸다거나, 경고를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주변 사람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가해자가 원래 주변 여성들에게 추근덕대는 상습범이어서 다들 알고 있고 서로 도와줄 수 있으면 가장 좋지만, 그게 아니라 몰래 나한테만 접근해서 성추행을 하는 상황이면 의외로 주변 사람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요즘 이런 일을 겪고 있다'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목격'을 부탁해야 합니다. 그럼 가해자가 나한테 가까이 와 있을 때는 주변 사람들이 더 눈여겨서 봐줄 것이고, 추행 장면을 실제로 목격하고 나중에 결정적인 목격증언을 해줄 수 있습니다.
보통 직장 내 성추행 케이스에서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가해자인 직장상사가 상습적으로 접근해서 크고작은 성추행을 반복하면 CCTV가 있지 않는 이상 증거 확보가 애매하고 피해자 진술밖에 없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가해자의 변명이 아주 잘 먹힙니다. '몰랐다 다음부터 조심하겠다'라면서 넘어가는 것이지요. 이럴 때 그 상습적인 추행 장면을 목격한 주변 동료들이 있으면 피해자가 승소할 가능성이 아주 높아집니다.
"몰래 녹음기를 켜놓고 가해자에게 따지세요"
제일 좋은 건 카메라나 CCTV를 설치해놓고 증거 현장을 잡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애매한 직장 내 성추행에서 이런 증거를 가져오시는 피해자분들을 본 적도 없구요. 그래서 녹음기를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녹음기는 핸드폰 어플만 켜도 쓸 수 있으니까요.
추행이 예상되는 상황, 가해자가 나를 오라고 불렀다거나, 둘이서 회의를 한다거나 이럴 때 미리 녹음기를 켜놓는 겁니다. 그리고 가해자가 추행할 때, 화를 내는 정도는 아니어도 거부하거나 살짝 따지듯이 이야기를 하세요. '저기 손좀...' 또는 '불편해서요'라고 가볍게 의사표현을 하는 정도면 됩니다. 그럼 가해자가 짧게 사과를 한다던가 당황하는 상황이 이어지겠죠. 계속 녹음기를 켜놓고 있으면 이런 상황이 전체적으로 녹음될 것입니다. 그럼 영상이 아니더라도 '가해자가 무슨 행동(추행)을 했고, 그래서 싸우는구나'라고 전후 상황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성추행에서 가해자들이 제일 많이 하는 거짓말 중에 하나는 '나는 아예 만진 적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가해자들이 이렇게 주장할 때 경찰이 녹음파일을 들이밀면, 그때부터는 당황해서 말이 전부 꼬이겠지요. 그래서 녹음파일은 아주 유용한 증거가 됩니다.
내가 당한 것이 성추행이 맞는지 기준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기분이 나빴으면 성추행입니다.
내가 기분이 안 나빴으면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필요도 없었겠지요.
정작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는 마음이 편하고, 피해자만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드는 것은 성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 때문입니다.
내가 당한 것, 성추행 맞으니까 나를 의심하지 말고
앞으로는 어떻게 싸울지, 어떻게 증거를 확보하고 가해자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지 고민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