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다움은 법에 없습니다. 형법에도 성폭력처벌법에도 피해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해 둔 조문은 한 줄도 없고, 대법원은 통념에 그려진 피해자 모습과 다르다는 사정만으로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이미 판시했습니다(대법원 2018도7709). 그러니 조사실에서 듣는 그 질문들은 법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묻는 사람 머릿속에 있는 기대를 피해자에게 확인시키는 절차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 기대에 정해진 모양이 없다는 점입니다. 어떤 수사관은 그날 바로 신고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보고, 어떤 상대방 변호인은 사건 뒤에 오간 인사 한 줄을 붙잡습니다. 기준 없는 잣대는 결국 어떤 피해자도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 됩니다. 실제로 피해자다움은 사건의 실체를 가리는 도구가 아니라, 피해자를 심사해 사건을 지우는 도구로 쓰여 왔습니다.
이 글은 피해자다움이라는 말의 정체, 조사와 법정에서 나오는 질문마다 대법원이 내놓은 답을 사건번호와 함께 정리한 표, 그리고 그 판례를 실제 절차에서 꺼내 쓰는 방법을 순서대로 다룹니다.
피해자다움 뜻, 법전에 없는 잣대가 조사실에 남은 이유
피해자다움은 피해자라면 마땅히 이러이러하게 행동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시 신고하고, 가해자를 곧바로 끊어내고, 한동안 무너져 있어야 하고, 필사적으로 반항했어야 한다는 식입니다. 이 기대는 법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래된 통념에서 왔습니다.
뿌리는 꽤 깊습니다. 대법원은 강제추행죄의 폭행·협박에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를 요구해 온 종전 기준을 2023년 전원합의체 판결로 폐기하면서, 그 기준 자체가 피해자에게 일정한 태도를 요구하는 관점 위에 서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판시 취지 ·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을 요구하는 종전 법리는 피해자에게 ‘정조’를 수호하는 태도를 요구하는 입장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지적입니다(대법원 2018도13877 전원합의체).
법이 요구를 거둬들인 뒤에도 조사실의 질문은 남았습니다. 피해자다움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조문에서 사라진 요구가 심증의 형태로 살아남으면, 피해자는 반박할 대상조차 특정하지 못한 채 불리해집니다. 그래서 이 잣대는 반박이 아니라 이름 붙이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받고 있는 질문이 사실을 묻는 질문인지, 피해자다움을 확인하는 질문인지 구분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피해자다움 판례, 질문별로 대법원이 내놓은 답
아래 표는 조사와 법정에서 반복되는 질문을 왼쪽에 두고, 그 질문에 정면으로 답한 대법원 판단과 사건번호를 오른쪽에 붙인 것입니다. 판시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취지를 줄여 적었고, 사건번호는 판결문과 법률정보 서비스에서 확인한 것만 실었습니다.
| 조사·법정에서 나오는 질문 | 대법원이 내놓은 답 | 사건번호 |
|---|---|---|
|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습니까 | 2차 피해가 두려워 종전 관계를 유지하거나 제3자의 권유로 뒤늦게 신고하기도 한다 | 2017두74702 |
| 피해자 같지 않은데 그 말을 믿습니까 | 통념에 그려진 피해자 모습과 다르다는 사정만으로 신빙성을 부정할 수 없다 | 2018도7709 |
| 왜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습니까 |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거나 나중에 보면 피할 수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 | 2005도3071 |
| 강하게 저항한 흔적이 있습니까 | 강제추행의 폭행·협박에 항거곤란 정도를 요구하던 종전 기준을 폐기한다 | 2018도13877 전원합의체 |
| 진정한 피해자라면 그랬겠습니까 | ’진정한 피해자라면 마땅히’라는 기준으로 피해자의 변소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 | 2018도2614 |
| 피해자 말만 믿고 가는 것 아닙니까 | 성인지적 관점은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 없이 인정하거나 무조건 유죄로 판단하라는 뜻이 아니다 | 2023도13081 |
표를 세로로 훑으면 공통점이 보입니다. 대법원이 금지한 것은 행동을 근거로 피해자인지 아닌지를 역산하는 추론 자체입니다. 늦었다는 사실, 웃었다는 사실, 다시 만났다는 사실은 여전히 기록에 남지만, 그 사실에서 곧바로 '그러므로 거짓'이라는 결론으로 건너뛰는 것이 금지됐습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이 판단들이 한 판결에 몰려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2005년 강간죄 사건에서 2018년 성희롱 행정 사건과 형사 사건을 거쳐 2023년 전원합의체와 2024년 판결까지, 서로 다른 절차에서 같은 방향으로 쌓였습니다. 그래서 의견서에 한 건만 붙이는 것보다 질문의 종류에 맞는 판례를 골라 붙이는 편이 훨씬 강합니다.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지연을 변명하지 마시고, 신고를 막고 있던 조건을 사실로 답하시면 됩니다. 늦었다는 점을 사과하듯 설명하면 지연이 쟁점으로 굳어집니다. 반대로 그 기간에 무엇이 두려웠고 무엇을 잃을 상황이었는지를 이름과 날짜가 붙은 사실로 말하면, 지연은 해명 대상에서 사건의 경위로 옮겨 갑니다.
전제부터 틀렸다는 점도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여성가족부가 만 19세 이상 64세 이하 남녀 1만 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2023년 발표한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에서, 성폭력 피해를 한 번이라도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다는 응답은 2.6%였습니다. 늦은 신고가 예외인 것이 아니라 신고 자체가 예외입니다. 즉시 신고라는 기준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표본을 기준으로 삼는 셈입니다.
수년이 지나 고소한 사건이 실제로 어떻게 인정됐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담임 교사가 미성년 제자를 전시회에 가자며 자기 집으로 데려가 술을 권하고 팔 안쪽을 주무른 사건입니다. 피해자가 불쾌하다고 문제를 제기하자 가해자는 다른 학생들도 집에 온다며 친한 사이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으냐는 태도로 일관했고, 피해자는 매일 마주쳐야 하는 담임이라는 관계 때문에 사과도 받지 못한 채 피해를 묻어 두었습니다. 성인이 된 뒤 가해자가 학교에서 승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트라우마가 악화되자 그제야 고소를 결심했습니다.
가해자 집에서 벌어진 일이라 CCTV 같은 직접증거가 없었고 사실상 피해자 진술뿐이었습니다. 심앤이는 지인 진술서와 학교 인권회에 남은 신고 기록, 당시 받은 심리상담 자료, 친구와 가족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문자를 모아 진술을 받치고, 경찰조사에 입회해 수년이 지나 고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폐쇄적인 학교 분위기, 사제 관계를 집중적으로 진술하도록 조력했습니다. 그 결과 피해자 진술만으로 아동·청소년 위계 등 추행 혐의가 인정돼 검찰에 송치됐습니다(사건 보기).
사건 뒤에도 연락하고 만났으면 불리합니까?
불리하지 않습니다. 이 질문에는 대법원이 이미 답을 내놓았습니다. 피해자는 2차 피해가 두려워 종전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제3자의 권유로 뒤늦게 신고하기도 한다는 것이 2017두74702의 판시입니다. 관계를 끊지 못한 것은 피해를 부정하는 사정이 아니라, 끊지 못하게 만든 힘이 있었다는 사정입니다.
그러니 준비해야 할 것은 연락을 부인하는 일이 아니라 관계를 정리할 수 없었던 이유를 자료로 바꾸는 일입니다. 유포 위험, 직장이나 학교에서의 불이익, 소문, 생계처럼 구체적인 조건이 여기 들어갑니다.
촬영 사실을 알고도 교제를 이어가다 뒤늦게 고소한 사건이 그 예입니다. 연인이던 가해자가 성관계 중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정황을 느껴 피해자가 촬영은 싫다고 분명히 거부했는데도 가해자는 찍은 적 없다고 둘러댔고, 불안해진 피해자가 잠든 가해자의 휴대전화를 확인해 백업 앱에 지역·나이·이름으로 분류돼 저장된 수백 개의 나체 사진과 영상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도 피해자는 마음을 정리하지 못해 관계를 이어갔고, 수개월 뒤 헤어진 다음에야 영구 삭제를 위해 고소했습니다.
수사가 시작되자 가해자는 저장 앱을 삭제하고 계정을 탈퇴한 뒤 휴대전화까지 바꿔 포렌식에서 촬영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심앤이는 촬영을 명확히 거부했고 가해자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 이별을 요구하면 촬영물을 유포할 위험이 커서 관계를 쉽게 정리할 수 없었던 사정, 교제 기간에 유포 불안으로 받은 정신과 진료 기록을 묶어 지연 경위를 설명했고, 피해자가 찍어 둔 촬영물 사진과 추궁 대화 녹취록을 제출해 카메라등이용촬영 혐의로 검찰송치를 받아냈습니다(사건 보기).
웃고 있었다는 지적은 어디서 나옵니까?
대개 가해자가 아니라 주변과 수사기관에서 나옵니다. 친한 사이였다거나 분위기가 좋았다는 정황이 붙으면 사건이 장난으로 축소되고, 그 축소가 시작되면 피해자의 표정과 말투까지 심사 대상이 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감정을 해명하는 일이 아니라 행위 자체를 정확한 언어로 되돌려 놓는 일입니다.
같은 동아리 부원에게 당한 기습추행 사건이 그랬습니다. 부원들이 피해자의 생일을 축하해 준 술자리였고, 자리가 끝나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가해자가 허리를 감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습니다. 피해자가 불쾌하다고 밝히며 몸을 피했는데도, 차가 도착해 인사를 나누는 찰나에 한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쥐어 주물렀습니다. 이튿날 먼저 연락해 사과하고 동아리에서 빠지겠다던 가해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모임에 복귀했고, 부원들에게는 그날 일을 자랑거리처럼 옮기고 다녔습니다. 혼자 신고한 피해자에게 돌아온 것은 담당 수사관이 사건을 친구 사이의 장난 정도로 본다는 현실이었습니다.
심앤이는 먼저 정보공개청구로 수사기록부터 받아 본 다음, 65페이지에 이르는 피해자 변호사 의견서를 작성했습니다. 스친 것이 아니라 주물렀다는 행위의 구체성, 사건 직후 가해자가 스스로 사과한 사실, 목격자 진술과 피해자 진술이 맞아떨어진다는 점을 차례로 짚었습니다. 술에 취해 기억나지 않는다는 변명은 그날 가해자가 직접 계산을 마무리할 만큼 정신이 또렷했다는 정황으로 무너뜨렸습니다. 여기에 피해자 탄원서를 더해 강제추행 혐의로 검찰송치를 이끌어냈습니다(사건 보기). 예고 없이 이뤄지는 기습적인 신체 접촉이 어떤 기준으로 처벌되는지는 성추행에 정리돼 있습니다.
피해자다움 강요는 2차 가해입니다
아래는 피해자가 실제로 듣는 말과, 그 말에 숨어 있는 전제, 그리고 그 전제를 무너뜨리는 근거를 나란히 둔 표입니다. 말이 나올 때마다 세 번째 칸을 먼저 떠올리시면 됩니다.
| 자주 듣는 말 | 그 말에 깔린 전제 | 전제를 무너뜨리는 근거 |
|---|---|---|
| 진짜 당했으면 바로 신고했겠지 | 피해자는 즉시 신고한다 | 경찰 신고 경험 2.6%(여성가족부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
| 그 뒤에 왜 또 만났어 | 피해자는 가해자를 즉시 끊는다 | 2차 피해가 두려워 종전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2017두74702) |
| 웃고 있던데 무슨 피해자야 | 피해자는 늘 무너져 보인다 | 통념 속 모습과 다르다는 사정만으로 배척할 수 없다(2018도7709) |
| 싫었으면 죽기 살기로 반항했겠지 | 저항의 강도가 피해를 증명한다 | 끝까지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단정할 수 없다(2005도3071) |
| 무고로 걸리면 인생 끝난다 | 신고는 위험한 도박이다 | 불기소나 무죄로 끝났다는 것만으로 허위 신고로 단정할 수 없다(2018도2614) |
이 말들은 위로의 탈을 쓰고 오지만 기능은 하나입니다. 피해자가 절차를 시작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시작한 절차에서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직장이나 학교처럼 계속 마주쳐야 하는 공간에서 이런 말이 반복되면 그것은 분위기가 아니라 2차 가해이고, 대응 수단도 따로 있습니다. 가해자 측이나 주변 사람의 2차 가해를 기록으로 남기고 제지하는 방법은 2차 가해·보복범죄 대응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피해자답지 않다며 무고로 역고소하겠다고 합니다
역고소 협박은 피해자다움 요구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가해자 측은 신고가 늦었다거나 사건 뒤에도 연락했다는 점을 모아 진짜 피해자가 아니라는 서사를 만들고, 그 서사를 무고 고소장에 옮겨 담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성폭력 신고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되거나 무죄 판결이 났다고 해서 그 신고를 곧바로 허위라고 볼 수는 없다고 했고, '진정한 피해자라면 마땅히 이랬을 것'이라는 기준으로 피해자의 해명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2018도2614).
한편 성인지적 관점을 유지한다는 것이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 없이 인정하거나 무조건 유죄로 판단하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판시도 있습니다(2023도13081). 가해자 측은 이 문장을 즐겨 인용하지만, 이 판시가 되살리는 것은 증명책임이지 피해자다움이 아닙니다. 진술을 꼼꼼히 따지는 일과 통념으로 피해자를 걸러내는 일은 전혀 다른 작업입니다.
조사에서 이 판례들을 어떻게 씁니까?
첫째, 질문의 종류를 구분해 답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질문에는 사실로 답하고, 왜 그렇게 행동했느냐는 질문에는 그 행동을 만든 조건으로 답하시면 됩니다. 두 답을 섞지 않는 것만으로 조서의 결이 달라집니다.
둘째, 조서에 남는 문장을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진술이 끝나면 조서를 열람하고 사실과 다른 부분은 그 자리에서 정정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냥 무서웠다"로 압축된 문장은 조건이 지워진 문장이므로, 두려움을 만든 관계와 불이익이 들어가도록 고쳐 달라고 요청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조사 단계에서 피해자 변호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수사절차(경찰·검찰)에 단계별로 정리돼 있습니다.
셋째, 판례는 말이 아니라 서면으로 제출할 때 힘을 냅니다. 피해자 변호사 의견서에 이 글의 표처럼 질문과 판례를 짝지어 붙이면, 담당자가 통념으로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진술을 받쳐 줄 자료를 어디서부터 모을지 막막하시다면 증거가 없는 경우에 항목별로 정리돼 있습니다.
피해자다움은 피해자를 검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지 사건을 판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 아닙니다. 늦게 신고했든, 웃었든, 다시 연락했든 달라지는 사실은 하나도 없습니다. 달라져야 하는 것은 피해자의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을 근거로 피해를 지워 온 관행입니다. 그 관행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 조사실에서 해명해야 할 것과 설명하면 되는 것이 분명하게 갈립니다.
자주 묻는 질문
관련 실제 사례
심앤이가 실제로 대리한, 이 주제의 사건 기록이에요. 결과는 사건마다 달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