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피해 사건에서 피해자가 가장 자주 듣는 말은 "그건 법리상 어렵습니다"라는 답변입니다. 그런데 그 답변의 바탕이 되는 기준이 이미 대법원에서 폐기된 옛 잣대인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더 강하게 저항했어야 한다거나, 진짜 피해자라면 곧바로 신고했어야 한다는 식의 판단이 대표적입니다.
판례는 법률가만 다루는 지식이 아닙니다. 조사를 받고 진술조서에 서명하기 전, 의견서를 낼 때, 불송치 통지를 받고 이의신청서를 쓸 때 한 줄로 적어 넣는 실무 도구에 가깝습니다. 사건번호와 한 줄 요지, 그리고 그 판결을 어느 단계에서 꺼내는지만 알아도 같은 사실관계가 전혀 다르게 읽힙니다.
아래 열 건은 성폭력 사례를 다루면서 반복해 등장하는 대법원 판결입니다. 표에 요지와 활용 단계를 함께 넣었고, 이어지는 본문에서 각 판결이 어떤 반박을 막아 주는지 풀어 두었습니다.
판례가 실제로 쓰이는 자리, 진술조서부터 이의신청서까지
판례를 꺼내는 자리는 크게 세 곳입니다. 첫째는 수사 단계의 진술입니다. 조사받는 자리에서 판결 번호를 외워 말할 필요는 없지만, 수사관이 옛 기준으로 질문을 던질 때 그 기준이 지금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대답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둘째는 의견서입니다. 사실관계를 먼저 정리하고 쟁점마다 판결 한 줄을 붙이면, 같은 주장이 감상이 아니라 법리로 읽힙니다.
셋째가 불복 서면입니다. 경찰의 불송치 결정서와 검사의 불기소 이유서에는 판단의 근거가 문장으로 적혀 있습니다. 그 문장이 대법원 법리와 어긋나는 지점을 짚는 것이 이의신청서의 뼈대입니다. 새 증거를 찾아내는 것보다, 이미 제출한 자료를 잘못 평가했다는 점을 판결로 드러내는 편이 실제로는 더 자주 통합니다.
이의신청서에 적는 문장 예시: “불송치 결정서는 피해자가 사건 다음 날 평소처럼 출근했다는 사정을 진술 배척의 근거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 2018도7709 판결은 피해자의 대처 양상이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러한 판단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판례 10선 ① 추행의 성립과 피해자 진술
먼저 다섯 건은 행위가 범죄로 성립하는지, 그리고 피해자의 진술을 믿을 수 있는지를 다루는 판결입니다. 표의 '쓰는 단계'는 그 판결이 가장 힘을 내는 지점입니다.
| 대법원 사건번호 | 한 줄 요지 | 쓰는 단계 | 이런 말이 나올 때 |
|---|---|---|---|
| 2018도13877 전원합의체 | 강제추행의 폭행·협박 기준 완화 | 진술·의견서 | ”왜 강하게 뿌리치지 않았나” |
| 2001도2417 | 기습 추행은 행위 자체가 폭행 | 고소장 | ”때린 것도 아니지 않나” |
| 2018도7709 | 피해자다움을 요구할 수 없음 | 모든 단계 |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나” |
| 2019도4047 | 사후 대응만으로 신빙성 부정 불가 | 의견서·이의신청 | ”그 뒤에도 만나지 않았나” |
| 2012도14788 전원합의체 |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 성립 | 고소장 | ”부부·연인 사이 아닌가” |
이 다섯 건은 서로 붙여 쓸 때 효과가 커집니다. 행위가 성립한다는 판결과 진술을 배척하면 안 된다는 판결은 방어하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해자 측은 보통 성립 자체를 다투다가, 그것이 막히면 피해자의 태도를 문제 삼는 순서로 옮겨 갑니다.
판례 10선 ② 항거불능·불법촬영·증거능력
나머지 다섯 건은 술과 약물, 촬영, 증거를 둘러싼 판결입니다. 수사 단계에서 사건이 꺾이는 지점이 대부분 여기라, 이의신청서에서 인용 빈도가 가장 높습니다.
| 대법원 사건번호 | 한 줄 요지 | 쓰는 단계 | 이런 말이 나올 때 |
|---|---|---|---|
| 2018도9781 | 기억이 끊겨도 항거불능 인정 가능 | 이의신청 | ”블랙아웃은 심신상실 아니다” |
| 2018도16002 전원합의체 | 자는 척했어도 준강간 불능미수 | 의견서 | ”실제로는 깨어 있었다” |
| 99도5187 | 옷을 벗기고 신체를 만졌다면 착수 | 죄명 다툼 | ”추행으로 낮추자” |
| 2013도4279 | 옷차림·각도·거리 등 종합해 판단 | 고소장 | ”예전에 허락했다” |
| 2010도10677 | 저장하지 않아도 촬영죄 기수 | 이의신청 | ”파일이 남아 있지 않다” |
표에 넣지 못했지만 함께 알아 둘 판결이 두 건 더 있습니다. 촬영에 이르기 전 단계라도 처벌된다는 판결(대법원 2021도749)과, 대화에 참여한 당사자가 직접 한 녹음은 증거로 쓸 수 있다는 판결(대법원 97도240)입니다. 앞의 판결은 미수 처벌의 근거가 되고, 뒤의 판결은 피해자가 스스로 모은 녹음의 자격을 지켜 줍니다.
기습추행과 피해자다움, 기준을 바꾼 판결들
가장 크게 바뀐 것은 강제추행의 성립 기준입니다. 대법원은 2023년에 나온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폭행이나 협박이 저항을 어렵게 할 만한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던 오래된 요건을 버렸습니다. 지금은 신체에 대한 불법한 유형력이 행사됐거나 공포심을 일으킬 만한 해악의 고지가 있으면 충분합니다. 갑자기 만지고 지나가는 이른바 기습 추행은 그 행위 자체가 폭행으로 평가된다는 법리도 함께 확립돼 있습니다. 힘과 협박이 얽힌 사건의 죄명과 형량은 성추행에 정리돼 있습니다.
진술 쪽에서 축이 되는 판결은 성인지 감수성 판결입니다. 대법원은 성범죄 피해자가 이후에 겪을 불이익을 두려워해 저마다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전형적인 피해자상과 다르다는 사정만으로 진술을 함부로 물리쳐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늦은 신고, 사건 이후의 어색한 연락, 겉으로 평온해 보였던 일상이 그 자체로 불리한 사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만 판결이 있다고 해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늦어진 사정이나 연락을 이어 간 사정을 사실대로 적어 두면, 판례가 그 설명을 받쳐 주는 구조가 됩니다. 위협에 눌려 가해자를 다시 만나거나 연락에 응했더라도, 그 뒤의 행동을 이유로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시입니다(대법원 2019도4047). 관계를 이유로 망설일 필요도 없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전원합의체 판결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술에 취해 기억이 없는 사건에서 기대는 판례
이 유형은 불송치가 가장 자주 나오는 자리입니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고 기억만 끊긴 상태였으니 심신상실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가 붙습니다. 대법원의 법리는 그 이분법과 다릅니다. 의식이 남아 있었더라도 알코올의 영향으로 판단능력이나 저항능력이 뚜렷하게 떨어져 있었다면 항거불능으로 볼 수 있고, 그 판단은 마신 양과 마신 속도, 평소 주량, 가해자를 만나게 된 경위, 사건 뒤의 반응까지 함께 놓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는 척한 경우입니다. 무서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이 가해자의 빠져나갈 구멍이 되지 않습니다. 피해자가 잠들어 반항하지 못한다고 믿고 범행에 나아갔다면 준강간의 불능미수가 성립한다는 것이 전원합의체 판결입니다. 미수라는 이름과 달리 형을 깎아 주는 것은 법원의 재량이라, 실제 선고가 가볍게 끝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 번째는 죄명이 낮아지는 것을 막는 판결입니다. 잠든 상태의 피해자에게서 옷을 벗겨 내고 몸을 만지는 데까지 나아갔다면, 그 시점에 이미 준강간의 실행에 착수한 것으로 봅니다. 수사기관이 준강제추행으로 정리하려 할 때 이 법리를 근거로 다투게 됩니다.
의견서에 적는 문장 예시: “피해자는 사건 당일 소주 두 병가량을 약 한 시간 반 동안 마셨고, 평소 주량은 소주 한 병입니다. 대법원 2018도9781 판결은 음주량과 음주 속도, 평소 주량, 사건 전후의 반응을 종합해 항거불능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고 있으므로, 위 사정들은 그 판단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파일이 남아 있지 않아도 불법촬영은 성립합니다
촬영 사건에서 피해자를 가장 무너뜨리는 말은 "휴대전화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입니다. 그런데 이 범죄는 촬영 버튼을 누른 그때 기기에 영상 정보가 들어갔다면 이미 완성된 것으로 봅니다. 저장 단계를 거치지 않아 파일이 남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뒤에 지워졌는지, 포렌식에서 복원됐는지는 성립 여부와 관계가 없습니다.
찍기 전에 들킨 경우도 처벌 대상입니다. 치마 아래로 휴대전화를 밀어 넣은 정도라면 이미 실행에 착수한 것이라는 판결이 있습니다. 예전에 촬영에 응한 적이 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막힙니다. 동의는 촬영이 이루어지는 순간마다 따로 판단하고, 법원은 그때의 옷차림과 노출 범위, 찍은 장소와 각도, 거리, 특정 부위를 부각했는지 등을 하나하나 살핍니다.
증거가 하나도 없다고 느껴질 때 가장 먼저 확인할 것은 스스로 남긴 기록입니다. 대화에 참여한 사람이 상대에게 알리지 않고 한 녹음도 위법하게 모은 증거가 아니라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입니다. 기록을 남기고 지키는 구체적인 방법은 증거가 없는 경우에 따로 모아 두었습니다.
판례를 인용할 때 놓치기 쉬운 지점
- 사건번호만 나열합니다. 번호는 근거의 이름표일 뿐입니다. 결정서의 어느 문장과 충돌하는지를 함께 적어야 읽는 사람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사실관계를 적지 않고 법리부터 씁니다. 판례는 사실에 붙어야 힘이 생깁니다. 마신 양과 시간, 그날의 대화, 사건 뒤의 연락처럼 확인 가능한 사실을 먼저 적습니다.
- 판결을 만능으로 씁니다. 성인지 감수성 판결은 진술을 무조건 믿으라는 취지가 아닙니다. 이유 없이 배척하지 말라는 기준이므로, 늦은 신고의 경위는 여전히 설명해야 합니다.
- 번호가 정확하지 않은 채로 적습니다. 확신이 없다면 번호를 빼고 취지만 적는 편이 낫습니다. 틀린 번호 하나가 서면 전체의 신뢰를 깎습니다.
- 모든 판례를 한 서면에 몰아넣습니다. 쟁점이 흐려집니다. 다투는 지점 한 개당 판결 한두 건이면 충분합니다.
불송치·불기소 통지를 받으면 판례를 어디에 적나요?
불송치 통지를 받았다면 이의신청서에, 검사의 불기소 통지를 받았다면 항고장에 적습니다. 앞에서 본 구조는 두 서면에 그대로 옮겨 쓰면 되고, 달라지는 것은 내는 곳과 이어서 사건을 들여다보는 기관입니다. 이의신청서는 불송치 결정을 한 경찰서에 내며, 접수되면 사건이 검찰로 넘어가 다시 판단을 받습니다. 항고는 불기소 처분을 한 지방공소청·지청에 항고장을 내면 관할 광역공소청장이 판단합니다.
두 서면은 힘을 주어야 할 대목도 다릅니다. 이의신청은 사건을 검사의 판단으로 다시 올리는 절차라, 어떤 조사가 빠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적어 두는 편이 유리합니다. 항고는 이미 검사가 자료를 모두 보고 내린 결론을 다투는 자리이므로, 그 결론이 어느 판례와 어긋나는지를 앞세우는 편이 낫습니다. 어느 쪽이든 새 증거가 없어도 서면은 성립합니다. 두 서면을 쓰는 순서와 기한은 불송치·불기소 대응에 단계별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2026년 10월 2일부터는 이 가운데 일부가 달라집니다. 불송치에 대한 이의신청에 통지받은 날부터 3개월이라는 기한이 새로 생기고(불기소에 대한 항고 기한 30일은 그대로입니다), 검사가 피해자를 직접 조사하는 절차가 없어져 첫 경찰조사의 비중이 커집니다. 판례로 반박할 대목은 그 조사 전에 미리 정리해 두시는 편이 낫습니다. 바뀌는 내용 전체는 개정 내용 정리에서 따로 다루고 있습니다.
판례를 안다고 해서 사건이 저절로 풀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수사기관이나 상대방이 옛 기준으로 사건을 재단할 때, 그 기준이 이미 바뀌었다는 사실을 문서로 남겨 둘 수는 있습니다. 그 한 줄이 있고 없고가 다음 단계의 판단을 가르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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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앤이가 실제로 대리한, 이 주제의 사건 기록이에요. 결과는 사건마다 달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