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지 감수성은 같은 상황도 성별에 따라 처지와 위험이 달라진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그 차이를 판단에서 빠뜨리지 않는 능력을 뜻합니다. 대법원은 2018년 이 말을 판결문에 쓰면서, 성폭력 사건을 심리할 때 사건이 벌어진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는 태도라고 풀었습니다(대법원 2017두74702, 2018도7709).
그런데 인터넷에서 이 말은 전혀 다른 뜻으로 돌아다닙니다. 피해자가 울면 유죄가 되는 제도,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모는 사상이라는 식입니다. 판결문에는 그런 문장이 한 줄도 없습니다. 오히려 같은 판결문이 유죄를 인정하려면 합리적인 의심이 없을 정도의 증명이 필요하다는 원칙부터 다시 적고 있습니다.
이 글은 말의 뜻과 법령상 근거, 이 단어가 판결문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 가장 흔한 오해 다섯 가지에 대한 반박, 피해자가 조사에서 이 기준을 쓰는 방법을 차례로 정리했습니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무엇입니까?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영향을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영어 gender sensitivity를 옮긴 말이고, '성인지(性認知)'라는 단어는 우리 법에서 양성평등기본법이 세 곳에 씁니다. 예산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재정에 반영하는 성인지 예산(제16조), 성별로 나눠 집계하는 성인지 통계(제17조), 공무원이 받는 성인지 교육(제18조)입니다. 이 가운데 뜻풀이에 가장 가까운 조문이 제18조입니다.
조문 요지 — 성인지 교육은 “법령, 정책, 관습 및 각종 제도 등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는 능력을 증진시키는 교육”을 말합니다(양성평등기본법 제18조 제1항).
여기에 '감수성'이 붙으면, 그 영향을 머리로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눈앞의 사건에서 놓치지 않는 민감함을 가리킵니다. 법이 말하는 성인지 감수성은 사상이나 구호가 아니라, 판단할 때 빠뜨리면 안 되는 사실을 보는 능력입니다.
아래 표는 이 말이 국제 규범과 법령, 판결문에 쓰인 자리를 시간 순서로 모은 것입니다. 위 두 줄이 말의 뿌리이고, 아래 네 줄이 법정에서 쓰인 기록입니다.
| 쓰인 곳 | 시기 | 내용 |
|---|---|---|
| 유엔 제4차 세계여성회의 행동강령 | 1995년 | 판사·경찰이 성별에 기반한 폭력의 성격을 이해하도록 교육하라고 각국에 요구 |
| 양성평등기본법 제16조~제18조 | 2015년 7월 1일 시행(전부개정) | 성인지 예산·통계·교육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의무로 규정 |
| 대법원 2017두74702 | 2018년 4월 12일 선고 | 성희롱 소송을 심리할 때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말 것 |
| 대법원 2018도7709 | 2018년 10월 25일 선고 | 같은 기준을 성폭력 형사재판에 적용 |
| 대법원 2018도2614 | 2019년 7월 11일 선고 | 성폭력 신고자가 무고로 재판받는 사건에도 같은 기준 적용 |
| 대법원 2023도13081 | 2024년 1월 4일 선고 | 성인지적 관점이 ‘무조건 유죄’를 뜻하지 않는다고 명시 |
표를 세로로 읽으면 이 말이 어느 날 갑자기 법정에 떨어진 유행어가 아니라는 점이 보입니다. 국제 규범에서 법률로, 법률에서 판결로 20년 넘게 걸려 내려온 말입니다.
성인지 감수성 유래, 법령 속 단어가 판결문에 들어오기까지
뿌리는 국제 규범입니다.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유엔 제4차 세계여성회의는 행동강령에서, 판사와 경찰 같은 사법 종사자가 성별에 기반한 폭력의 성격을 이해하도록 교육해 여성 피해자가 공정하게 대우받게 하라고 각국에 요구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흐름이 양성평등기본법의 성인지 예산과 통계, 교육 조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단어를 법정으로 가져온 사건은 대학교수의 성희롱이었습니다. 학생들을 여러 차례 성희롱했다는 이유로 해임된 교수가 소송을 냈고, 1심은 해임이 정당하다고 봤지만 항소심은 교수의 손을 들어 줬습니다. 한 피해 학생은 익명 강의평가에서 교수를 좋게 평가했고 그 뒤에도 수업을 계속 들었다는 점, 다른 피해 학생은 한참 지나 동료의 권유로 신고했다는 점이 진술을 믿지 않은 이유였습니다.
대법원은 2018년 4월 12일 이 판결을 깨고 사건을 돌려보냈습니다(2017두74702). 피해자는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피해 뒤에도 가해자와 종전의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곧바로 신고하지 못하다가 제3자의 권유를 계기로 비로소 신고하기도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설명이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살피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을 쉽게 물리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항소심이 의심의 근거로 든 사정들이, 대법원의 눈에는 성희롱 피해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성적과 진로를 쥔 교수 앞에서 학생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무엇이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여섯 달 뒤인 10월 25일 대법원은 같은 기준을 형사재판으로 넓혔고, 그 판결의 내용과 적용 사례는 (성인지 감수성 판결 해설)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성인지 감수성은 유죄추정입니까?
아닙니다. 무죄추정 원칙도, 범죄는 검사가 증명해야 한다는 원칙도 그대로입니다. 유죄추정이라는 비난이 표적으로 삼는 2018도7709 판결은 판결요지 첫 항에서, 유죄로 인정하려면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심증이 필요하다는 원칙부터 확인합니다. 성인지 감수성은 그다음 항에서 증거를 평가하는 방법으로 등장합니다.
대법원은 2024년 이 점을 아예 문장으로 못 박았습니다.
판시 취지 — 성범죄 사건에서 성인지적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 없이 인정해야 한다거나 공소사실을 무조건 유죄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대법원 2023도13081).
그러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금지된 것은 의심 자체가 아니라, '진짜 피해자라면 이랬을 것'이라는 잣대로 의심하는 방식입니다. 몸이 굳어 저항하지 못했다, 신고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 뒤에도 가해자의 연락에 답했다는 사정은 피해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증거가 아닌 것을 증거처럼 쓰지 말라는 요구를 유죄추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말의 뜻을 뒤집는 일입니다.
유죄추정이라는 비난이 성립하려면, 통념에 기대 피해자를 의심해 온 예전 관행이 중립이었어야 합니다. 그 관행은 중립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기운 저울이었고, 대법원은 저울을 수평으로 돌려놓았을 뿐입니다.
흔한 오해 5가지와 판결문에 실제로 적힌 내용
| 흔한 오해 | 판결문과 법령에 실제로 적힌 내용 | 근거 |
|---|---|---|
| 유죄추정이다 |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이 있어야 유죄, ‘무조건 유죄’를 뜻하지 않음 | 2018도7709, 2023도13081 |
| 피해자 말만 믿으라는 뜻이다 | 일관성·합리성·허위 진술 동기를 따져 믿을지 정함 | 2018도7709 |
| 남성 역차별이다 | 보호 대상은 특정 성별이 아니라 ‘성폭행이나 성희롱 피해자’ | 2018도7709, 양성평등기본법 제18조 |
| 뜻이 모호해 판사 마음대로다 | 법률에 근거를 둔 증거판단 방법이고 논리와 경험칙의 일부 | 양성평등기본법 제5조 제1항 |
| 거짓 신고를 부추긴다 | 무고죄는 그대로이고, 신고자가 무고로 재판받을 때에도 같은 기준 적용 | 형법 제156조, 2018도2614 |
가운데 칸은 모두 판결문과 조문에서 옮긴 내용입니다. 왼쪽 칸의 주장들에는 판결문을 읽지 않고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피해자 말만 믿는다는 주장입니다. 대법원이 진술을 믿는 조건은 구체적입니다. 주요 부분이 일관되는지, 경험칙에 비춰 비합리적이거나 스스로 모순되는 대목이 없는지, 허위로 불리한 진술을 할 동기가 드러나는지를 봅니다. 이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진술은 지금도 배척됩니다. 검증 항목에서 빠진 것은 '피해자다운 태도' 하나뿐입니다. 진술을 무엇으로 뒷받침하는지는 증거가 없는 경우가 항목별로 다룹니다.
남성 역차별이라는 주장도 판결문과 맞지 않습니다. 법이 정의하는 성인지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라는 것이고, 판결문이 보호하는 대상에도 성별 제한이 없습니다. 남성 피해자 사건에서 나오는 "남자가 왜 저항을 못 했느냐"는 말 역시 이 기준이 걸러 내는 통념입니다. 남성 피해자의 대응은 동성 성추행·남성 피해자에 있습니다. 통념을 걷어내서 손해를 보는 쪽은 남성이 아니라 가해자입니다.
거짓 신고를 부추긴다는 주장은 통계와 어긋납니다. 2017~2018년 검찰 통계에서 성폭력 무고로 재판에 넘겨진 인원은 같은 기간 처리된 성폭력범죄 인원의 0.78%를 넘지 않았습니다(성범죄 무고율 통계). 대법원은 성폭력을 신고한 사람이 무고로 재판받는 사건에서도, 불기소나 무죄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신고를 허위로 단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역고소가 실제로 들어왔을 때 밟는 순서는 무고죄 방어가 다룹니다.
성인지 감수성 사례, 통념을 걷어내자 결론이 달라진 사건들
심앤이가 진행한 사건에서 이 기준은 구호가 아니라 의견서의 한 단락으로 쓰입니다. 통념에 기댄 의심이 나오면, 그 의심이 증거가 아니라는 점을 짚고 빈자리를 사실로 채우는 방식입니다.
술자리에서 처음 만난 남성이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하고는 모텔로 향해 피해자를 추행한 사건이 있습니다. 가해자는 CCTV 속 피해자가 취해 보이지 않는다며 합의된 관계라고 주장했고, 수사 단계에서도 기억이 끊겼다가 추행 순간 정신이 들었다는 진술이 의심받았습니다. 평소 주량과 수술 이력, 예전에도 기억이 끊긴 적이 있음을 보여 주는 친구들과의 대화를 여덟 차례 의견서로 소명했고, 1심은 벌금 500만 원을 선고했으며 가해자의 항소는 기각됐습니다(사건 보기).
담임 교사에게 미성년 시절 추행을 당하고 수년 뒤 고소한 사건도 있습니다. 가해자의 집에서 벌어진 일이라 CCTV 같은 직접증거가 없었고, 피해자는 성인이 된 뒤 가해자의 승진 소식을 듣고 트라우마가 악화돼 고소를 결심했습니다. 당시 친구와 가족에게 털어놓은 문자, 심리상담 자료, 학교 인권회 신고 내역을 모으고 폐쇄적인 학교 분위기와 교사의 영향력을 의견서로 설명했고, 경찰은 위계추행 혐의를 인정해 사건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습니다(사건 보기).
가해자가 먼저 '거짓 신고'라는 틀을 꺼낸 사건도 있습니다. 오랜 친구가 술자리에서 정신을 잃은 피해자를 간음하고는, 합의된 관계였고 합의금을 노린 거짓 진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잠든 피해자를 술집에서 "들고 나왔다"고 말한 가해자 본인의 대화 내역, 당시 성관계가 어려웠던 건강 상태를 보여 주는 산부인과 소견서, 피해자가 먼저 돈을 요구한 적이 없다는 점을 제출했고 사건은 준강간으로 송치됐습니다(사건 보기).
'취해 보이지 않았다', '너무 늦게 고소했다', '돈을 노렸다'는 말은 모두 통념에 기댄 의심이었고, 결론을 정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피해자는 조사에서 이 기준을 어떻게 씁니까?
통념에서 나온 질문을 알아보고, 그 질문에 당시의 처지를 사실로 답하는 데 씁니다. 조사실에서 판결 번호를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왜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까", "왜 따라갔습니까", "왜 그 뒤에도 답장을 했습니까" 같은 질문이 나오면, 사건의 사실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피해자다움을 묻는 질문이라는 점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답은 해명이 아니라 설명이어야 합니다. 잘못을 변명하듯 말하면 통념의 틀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됩니다.
예문 — “그때 소리를 지르지 못한 것은 맞습니다. 옆방에 회사 사람들이 있었고, 제가 문제를 일으킨 사람으로 보일까 봐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서면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①통념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조서에 어떻게 적혔는지 확인하고, ②의견서에 그 사정이 진술을 배척할 사유가 될 수 없다는 점을 판결과 함께 적고, ③불송치나 불기소 이유서가 같은 통념에 기대고 있다면 불복 서면에서 그 문장을 그대로 짚습니다. 조사 단계마다 피해자가 요청할 수 있는 것은 수사절차(경찰·검찰) 편에서 순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개정 형사소송법(개정 내용 정리)이 시행되는 2026년 10월 2일 뒤에는 검사가 피해자를 따로 불러 묻던 단계가 사라지므로, 경찰 조서에 통념 섞인 문답이 그대로 남지 않게 챙기는 일이 그만큼 무거워집니다.
성인지 감수성 교육과 테스트를 찾는 분께
법이 정한 것은 교육이지 개인에게 점수를 매기는 검사가 아닙니다. 양성평등기본법 제18조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소속 공무원 등에게 성인지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고, 이 교육을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같은 전문기관에 맡길 수 있게 했습니다. 개인의 성인지 감수성을 측정하는 검사 규정은 이 법에 없습니다. '성인지 감수성 테스트'나 '자가진단'이라는 이름으로 도는 문항들은 스스로 돌아보기 위한 점검표일 뿐, 수사나 재판에서 쓰이는 검사가 아닙니다.
수사와 재판에서 실제로 시험대에 오르는 것은 점수가 아니라 문장입니다. 불송치 결정서나 판결문에 "피해자라면 마땅히 이렇게 했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지, 그 전제 말고 진술을 배척할 다른 근거가 있는지가 곧 그 기관의 성인지 감수성입니다. 피해자가 확인할 것도 같습니다. 결정문의 어느 문장이 통념에 기대고 있는지 찾는 일입니다.
성인지 감수성은 피해자를 무조건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피해자를 통념으로 재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늦게 신고했어도, 사건 뒤에 웃으며 출근했어도, 그 사정을 설명할 수 있다면 진술은 그 자체로 증거입니다. 이 말의 정확한 뜻을 아는 것이 그 설명의 출발점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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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앤이가 실제로 대리한, 이 주제의 사건 기록이에요. 결과는 사건마다 달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