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탐지기 검사도, 가해자와 얼굴을 맞대는 대질조사도 피해자가 반드시 응해야 하는 절차가 아닙니다. 응하지 않겠다는 뜻은 피해자 변호사를 통해 서면으로 밝히면 되고, 그 대신 피해자 진술분석 같은 다른 방법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제안이 대개 가해자가 범행을 전면 부인한 직후에 나온다는 점입니다. 가해자의 말이 강해질수록 수사기관이 확인해야 할 것은 가해자의 진술인데, 검사를 받아 보라는 말은 피해자에게 옵니다. 의심의 방향이 거꾸로 돌아오는 순간이고, 이것 자체가 2차 가해입니다.
이 글은 세 가지 기법이 각각 무엇인지, 결과가 법적으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요구를 받았을 때 무엇이라고 답하고 무엇을 대신 요청할지를 순서대로 정리했습니다.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꼭 받아야 합니까?
받지 않아도 됩니다. 검사는 피검사자가 동의해야 진행되는 절차이고, 피해자가 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고소가 각하되거나 수사가 중단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심앤이가 진행한 사건들에서도 수사관은 검사를 받아 볼 것을 '제안'했고, 피해자 측이 건강 상태를 설명하며 받지 않겠다고 회신한 뒤 다른 방법으로 진행됐습니다.
세 가지 기법은 성격이 다릅니다. 아래 표는 각각이 무엇을 확인하려는 절차이고 결과가 어떤 힘을 갖는지를 나란히 놓은 것입니다.
| 절차 | 확인하려는 것 | 응할 의무 | 결과의 지위 |
|---|---|---|---|
| 거짓말탐지기 검사 | 질문에 답할 때의 생리적 반응 | 없음, 동의로 진행 | 전제요건을 갖춰도 정황증거에 그침 |
| 가해자와의 대질조사 | 엇갈리는 진술의 접점 | 없음, 분리 조사 요청 가능 | 조서에 남는 진술 그 자체 |
| 피해자 진술분석 | 진술의 일관성과 내용의 특성 | 피해자 측이 먼저 요청 | 전문가 의견으로 기록에 편철 |
표를 가로로 읽으면 선택이 분명해집니다. 앞의 두 가지는 피해자가 감수해야 할 위험이 크고 얻는 것이 적은 반면, 진술분석은 피해자 측이 먼저 요청해서 기록을 늘리는 쪽입니다. 그래서 거절만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거절과 함께 대안을 같이 내는 것이 실무의 요령입니다.
거짓말탐지기 증거능력, 대법원이 세운 세 가지 전제요건
대법원은 거짓말탐지기 검사 결과에 증거능력을 인정하려면 세 가지가 모두 전제돼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반드시 일정한 심리상태의 변동이 일어나고, 그 심리상태의 변동은 반드시 일정한 생리적 반응을 일으키며, 그 생리적 반응으로 피검사자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가 정확히 판정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대법원 2005. 5. 26. 선고 2005도130 판결).
판시 취지 — 위 전제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검사 결과에 증거능력을 부여할 수 없고, 충족되어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경우라도 그 결과는 검사를 받은 사람의 진술의 신빙성을 가늠하는 정황증거로서의 기능을 하는 데 그칩니다.
정리하면 거짓말탐지기 결과는 유죄나 무죄를 결정하는 증거가 아니라, 잘해야 참고 자료라는 뜻입니다. 피해자가 받지 않겠다고 해서 사건이 불리해질 근거도, 받아서 통과했다고 해서 사건이 끝날 근거도 되지 못합니다.
이 한계는 심앤이가 진행한 사건에서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의뢰인은 오랜 친구의 집들이에 갔다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술자리에서 추행을 당했고, 자리를 피해 아이들이 자는 방에서 잠들었는데 그 사람이 따라 들어와 옷을 벗기고 간음했습니다. 가해자는 수사 내내 합의된 관계였다고 주장했고, 수사관은 피해자를 의심하는 태도로 조사를 이어 갔습니다.
의뢰인은 복용 중이던 약을 중단하고 검사를 받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가해자도 검사를 받아 혐의가 있다는 판단이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1심은 강하게 저항한 정황이 없다며 강간을 무죄로 보고 강제추행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6월 ·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습니다. 심앤이는 항소심에서 가해자가 몸 위에 올라탄 행위만으로도 반항을 억압하기에 충분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의견서로 다퉜고, 강간까지 유죄가 인정돼 징역 2년 ·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으며 합의금도 5,000만 원까지 올렸습니다(사건 보기).
약을 복용 중이면 검사를 받을 수 없습니까?
정신과 약을 복용 중이거나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이 있으면 생리적 반응 자체가 불안정해집니다. 검사는 호흡과 맥박, 피부 반응의 변화를 재는 방식이므로, 약물과 각성 상태가 그 수치를 흔들면 결과의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피해가 클수록 검사에 불리해지는 구조인 셈입니다.
그래서 건강 상태를 숨기고 무리해서 검사에 응하는 것이 가장 나쁜 선택입니다. 복용 중인 약과 진단명을 기재한 진료확인서를 첨부해 검사에 응하기 어려운 사정을 밝히고, 대신 다른 방법을 요청하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10년지기 친구가 과제를 하자며 집에 찾아와 저지른 강간 사건이 그 예입니다. 의뢰인은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지만 힘으로 제압당했고, 사건 뒤 정신과 치료와 약물 복용을 병행하느라 혼자 받은 1차 조사에서 피해 사실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가해자는 이성적 감정이 오가던 사이였고 합의된 관계였다고 부인했습니다.
수사관이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제안하자 심앤이는 의뢰인이 약물 복용으로 정서적·생리적 반응이 불안정하다는 점을 설명해 검사가 오히려 불안만 키운다는 뜻을 전달했고, 대신 피해자 진술분석을 요청했습니다. 진술 대비 미팅으로 2차 조사를 준비하고 세 차례 의견서를 내 정신적 피해와 가해자의 진술 번복을 정리한 끝에, 가해자는 강간치상죄로 불구속 구공판 기소됐습니다(사건 보기). 물증이 부족한 성폭행 사건에서 진술을 어떻게 세우는지는 유형별로 따로 정리돼 있습니다.
피해자 진술분석은 거짓말탐지기와 무엇이 다릅니까?
진술분석은 몸의 반응이 아니라 진술의 내용을 봅니다. 범죄심리학이나 임상심리학을 전공한 전문가가 피해자와 면담해 진술의 일관성과 구체성을 검토하고 의견을 내는 방식이어서, 약물이나 각성 상태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외상 반응 때문에 거짓말탐지기가 불리해지는 피해자일수록 진술분석이 유리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 다른 점은 누가 꺼내는가입니다. 거짓말탐지기는 수사기관이 제안하지만, 진술분석은 널리 알려진 제도가 아니어서 가만히 있으면 안내받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피해자 측이 필요성을 설명하며 먼저 요청해야 움직입니다.
오랜 친구가 동창 술자리 뒤에 저지른 강간 사건이 이 경로로 뒤집힌 예입니다. 의뢰인은 만취해 걷지 못할 정도가 되자 근처 모텔에서 자고 가기로 했는데, 함께 들어간 친구가 잠들려는 의뢰인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고 옷을 벗겼습니다.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멈추지 않았고, 의뢰인은 충격으로 정신과 진단을 받았습니다.
심앤이가 정보공개 청구로 확인한 고소장은 한 장짜리였고 1차 조사 진술도 부실해 그대로 종결되면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결제내역과 병원자료, 가해자가 사건 뒤 잘못을 인정하며 보낸 메신저를 모아 고소 보충서를 내고 2차 조사를 얻어 냈으며, 약물 복용으로 거짓말탐지기를 받을 수 없게 되자 진술분석을 신청해 진술이 신빙성 있다는 분석 결과를 받았습니다. 사건은 강간치상 혐의로 기소 의견 송치됐습니다(사건 보기).
진술분석 신청의 근거 조문과 필요적 의견 조회
근거는 성폭력처벌법 제33조입니다. 법원은 정신건강의학과의사, 심리학자, 사회복지학자, 그 밖의 관련 전문가로부터 행위자 또는 피해자의 정신·심리 상태에 대한 진단 소견과 피해자의 진술 내용에 관한 의견을 조회할 수 있고, 성폭력범죄를 조사·심리할 때에는 그 결과를 고려해야 합니다(같은 조 제1항·제2항).
이 규정은 수사기관이 성폭력범죄를 수사하는 경우에도 준용되며, 단서가 중요합니다. 피해자가 13세 미만이거나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경우에는 의견을 조회하여야 합니다(같은 조 제4항 단서).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는 뜻이므로, 해당하는 피해자라면 요청을 미루실 이유가 없습니다.
성인 피해자는 필요적 조회 대상이 아니므로 요청의 설득력을 갖춰야 합니다. 진료기록으로 외상 반응을 보이고, 가해자 진술이 번복된 경과를 정리하며, 물적 증거가 남기 어려운 사건 구조를 짚는 세 가지를 의견서에 담으면 받아들여지는 사례가 많습니다. 증거가 부족한 사건에서 무엇부터 모을지는 증거가 없는 경우에 항목별로 정리돼 있습니다.
가해자와 대질조사를 요구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대질은 진술이 엇갈릴 때 수사기관이 쓰는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 피해자가 반드시 감수해야 하는 절차가 아닙니다. 경찰청은 성폭력 사건의 수사와 피해자 보호에 관한 훈령을 따로 두고 조사 과정의 2차 피해를 막도록 정하고 있습니다(경찰청훈령 제1186호, 2025년 11월 13일 시행).
가해자를 마주 앉히면 피해자는 진술의 정확성보다 그 자리를 버티는 데 힘을 씁니다. 사건 당시의 공포가 되살아나 말이 끊기면, 그 끊김이 진술이 흔들렸다는 기록으로 남습니다. 대질에서 잃을 것은 크고 얻을 것은 없습니다.
| 요구 내용 | 먼저 확인할 것 | 회신에 담을 것 | 함께 요청할 것 |
|---|---|---|---|
| 거짓말탐지기 검사 | 복용 약과 치료 경과 | 응하지 않는다는 의사와 사유 | 피해자 진술분석 |
| 가해자와 대질 | 요구한 주체와 목적 | 분리 조사가 필요한 사정 | 영상 장비 활용·서면 진술 |
| 진술 재확인 | 어느 대목이 쟁점인지 | 기억나는 범위의 구분 | 피해자 변호사 의견서 |
| 추가 자료 제출 | 제출 범위와 기한 | 제출 가능한 항목 목록 | 사생활 자료 제외 요청 |
표에서 공통되는 것은 회신 방식입니다. 조사실에서 즉석에서 답하지 마시고, 피해자 변호사를 통해 서면으로 사유와 대안을 함께 내시기 바랍니다. 서면으로 남겨야 거부한 이유가 기록에 남고, 나중에 태도를 문제 삼을 여지가 없어집니다. 조사 단계마다 무엇을 낼 수 있는지는 수사절차(경찰·검찰)에 정리돼 있습니다.
거부하면 진술을 의심받지 않겠습니까?
의심받을 근거가 없습니다. 검사 결과 자체가 유죄의 증거가 되지 못하고 정황증거에 그친다는 것이 대법원의 태도이므로, 받지 않은 것을 불리한 사정으로 삼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거부를 숨길 것이 있다는 신호처럼 읽는 시선이 남아 있고, 이 시선이야말로 피해자를 먼저 의심하는 오래된 관행입니다.
가해자 측은 여기에 기대어 피해자가 검사를 거부했다거나 대질을 피했다고 주장하곤 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기록입니다. 응하지 않은 사유를 진료확인서와 함께 서면으로 미리 내 두면, 나중에 나오는 그 주장은 이미 설명이 끝난 이야기가 됩니다.
수사기관이 확인해야 할 것은 부인하는 가해자의 진술입니다. 피해자에게 검사를 권하기 전에 가해자에게 먼저 권하는 것이 순서라는 점을, 의견서에 분명히 적어 두시기 바랍니다.
요구를 받은 날 정리해 둘 것
첫째, 요구를 누가 어떤 이유로 했는지 날짜와 함께 적어 두십시오. 담당 수사관의 제안이었는지 가해자 측 요청이 전달된 것인지에 따라 회신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둘째, 복용 중인 약과 진단명, 치료 시작일을 한 장으로 정리해 두십시오. 응하기 어려운 사정을 설명할 때 가장 빠르게 쓰이는 자료이고, 그 자체가 피해의 지속성을 보여 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셋째, 거절과 대안을 한 문서에 담으십시오. 응하지 않겠다는 문장 뒤에 진술분석 요청이나 분리 조사 요청을 붙이면, 수사를 피하는 태도가 아니라 사건을 정확히 확인하자는 요구가 됩니다.
거짓말탐지기를 받지 않아도, 가해자와 마주 앉지 않아도 사건은 진행됩니다. 피해자가 증명해야 할 것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는가입니다. 그 방향을 되돌려 놓는 것부터가 조사 준비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관련 실제 사례
심앤이가 실제로 대리한, 이 주제의 사건 기록이에요. 결과는 사건마다 달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