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가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더라도,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그 재판은 열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 제9조 제1항 제3호가 성폭력범죄 피해자 또는 법정대리인이 국민참여재판을 원하지 아니하는 경우를 배제결정 사유로 못 박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권리에 시간제한이 있다는 점입니다. 배제결정은 공소제기 후부터 공판준비기일이 종결된 다음 날까지만 할 수 있습니다.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이미 문이 닫힌다는 뜻이고, 그래서 기소 사실을 늦게 알수록 선택지가 사라집니다.
이 글은 가해자가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는 이유, 배제 사유 네 가지와 신청 기한, 대법원이 요구하는 소명 내용과 의견서에 적을 항목을 차례로 정리했습니다.
가해자가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는 이유
법리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판단하는 사람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일반 형사재판에서는 수많은 성범죄 사건을 심리해 온 법관이 진술을 평가하지만, 국민참여재판에서는 그 사건을 처음 접한 시민들이 법정에서 본 장면만으로 배심원의 자리에 앉습니다.
가해자 측이 노리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왜 곧바로 신고하지 않았는지, 왜 그 뒤에도 연락했는지, 왜 술자리에 남았는지를 반복해 물으며 사건이 아니라 피해자의 태도를 심판대에 올리는 전략입니다. 성범죄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이른바 꽃뱀으로 몰아가기 좋은 무대라고 판단해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는 사례가 실제로 늘고 있습니다.
피해자 입장에서 이 재판은 절차 하나가 바뀌는 문제가 아닙니다. 익명의 시민들 앞에서 피해 경위를 다시 말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인격과 명예, 사생활이 노출될 위험이 커집니다. 법이 피해자의 의사를 배제 사유로 정한 이유도 바로 그 추가 피해 때문입니다.
피고인이 원하면 반드시 배심원 앞에 서야 합니까?
아닙니다. 국민참여재판은 대상사건이라도 두 가지 경우에는 하지 않습니다. 피고인이 원하지 않는 경우와, 법원이 제9조 제1항의 배제결정을 하는 경우입니다(같은 법 제5조 제2항).
피고인의 의사는 서면으로 확인합니다. 피고인은 공소장 부본을 송달받은 날부터 7일 이내에 국민참여재판을 원하는지 적은 서면을 내야 하고, 내지 않으면 원하지 않는 것으로 봅니다(제8조 제2항·제3항). 한 번 정해진 의사는 배제결정이나 회부결정이 있거나 공판준비기일이 종결되거나 제1회 공판기일이 열린 뒤에는 바꿀 수 없습니다(같은 조 제4항).
조문 요지 — 법원은 대상사건의 피고인에게 국민참여재판을 원하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하고(제8조 제1항), 피고인이 원하더라도 제9조 제1항의 사유가 있으면 배제결정으로 국민참여재판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제5조 제2항).
즉 가해자의 신청은 절차의 출발점일 뿐 결론이 아닙니다. 피해자 의사가 들어갈 자리가 법에 따로 마련돼 있습니다.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배제됩니다
배제 사유는 네 가지이고, 그중 세 번째가 성폭력범죄 피해자를 위한 규정입니다. 아래 표는 조문이 정한 내용과 그것이 피해자에게 갖는 의미를 나란히 놓은 것입니다. 표를 세로로 읽으면 3호만 성격이 다르다는 점이 보입니다. 다른 호가 재판 운영의 어려움을 다루는 반면, 3호는 오직 피해자 보호를 이유로 만들어졌습니다.
| 배제 사유 | 조문이 정한 내용 | 피해자에게 갖는 의미 |
|---|---|---|
| 제1호 | 배심원 등의 생명·신체·재산 침해 우려 | 재판 운영상의 사유 |
| 제2호 | 공범 중 일부가 원하지 않아 진행이 어려운 경우 | 재판 운영상의 사유 |
| 제3호 | 성폭력범죄 피해자·법정대리인이 원하지 않는 경우 | 피해자 의사가 직접 사유가 됨 |
| 제4호 | 그 밖에 국민참여재판이 적절하지 않은 경우 | 보충적 사유 |
여기서 말하는 성폭력범죄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의 범죄입니다. 강간과 강제추행은 물론 준강간, 카메라등이용촬영처럼 이 조문이 열거한 범죄가 모두 들어갑니다. 법원은 배제결정을 하기 전에 검사와 피고인 또는 변호인의 의견을 들어야 하고, 이 결정에는 즉시항고를 할 수 있습니다(제9조 제2항·제3항).
배제 신청은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공소제기 후부터 공판준비기일이 종결된 다음 날까지입니다(제9조 제1항). 이 시한은 생각보다 훨씬 이릅니다. 공판준비기일은 본재판에 앞서 쟁점과 증거를 정리하는 절차이므로, 피해자가 재판이 시작됐다고 체감할 무렵이면 이미 기한이 지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출발점은 기소 사실을 제때 아는 것입니다. 검사는 피해자나 법정대리인의 신청이 있으면 공소제기 여부와 공판의 일시·장소, 재판 결과, 가해자의 구속·석방 사실을 신속하게 통지해야 합니다(형사소송법 제259조의2). 이 통지를 신청해 두지 않으면 가해자가 언제 무엇을 신청했는지 모른 채 시간만 흘러갑니다.
가해자가 국민참여재판 의사 확인 서면을 낸 사실은 기록에서 확인됩니다. 고소 단계부터 피해자 변호사가 선임돼 있으면 열람·등사로 이를 확인해 곧바로 배제 의견서를 낼 수 있고, 그 시점이 결과를 가릅니다.
원하지 않는다는 말에 이유를 붙여야 하는 이유
법은 피해자의 의사를 사유로 정했지만, 실제 운용은 한 단계 더 요구합니다. 대법원은 2016년 3월 16일 자 2015모2898 결정에서, 피고인이 국민참여재판을 원하는 사건에서 제9조 제1항 제3호를 근거로 배제결정을 하려면 여러 사정을 고려해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배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판시 취지 — 3호는 국민참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인격이나 명예 손상, 사생활 비밀 침해, 성적 수치심, 공포감 유발 같은 추가 피해가 생길 수 있음을 고려해, 법원이 재량으로 국민참여재판을 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게 한 규정입니다(대법원 2015모2898).
솔직히 말하면 이 대목은 피해자에게 불리합니다. 법이 피해자의 의사 자체를 사유로 적어 두었는데도 다시 이유를 대라고 요구하는 셈이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피해자 몫이 됩니다. 다만 같은 결정이 무엇을 적으면 배제가 받아들여지는지 목록을 남겼다는 점은 그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사건에서는 14세 지적장애 피해자의 법정대리인이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고, 심리 과정에서 추가 피해가 생길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1심의 배제결정이 그대로 유지됐습니다. 대법원은 가해자의 재항고를 기각했습니다.
배제 의견서에 무엇을 적습니까?
대법원이 고려하라고 든 사정을 그대로 항목으로 바꾸면 됩니다. 막연히 두렵다고 쓰는 것과, 아래 네 칸을 사실로 채우는 것은 결과가 다릅니다.
| 법원이 보는 사정 | 의견서에 적을 내용 | 붙일 자료 |
|---|---|---|
| 원하지 않는 구체적 이유 | 배심원 앞 진술로 생길 노출과 2차 피해 | 사건 관련 소문·게시물 기록 |
|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 직장·학교·지역에서 계속 마주칠 사정 | 재직·재학 증명, 거주지 관계 |
| 피해자의 나이와 정신상태 | 진단명, 치료 경과, 진술 시 반응 | 정신과 진단서, 상담 기록 |
| 기존 보호제도로 부족한 사정 | 차폐나 비공개만으로 막지 못하는 노출 | 예상되는 신문 범위 정리 |
네 번째 칸이 실무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법원은 형사소송법과 성폭력처벌법,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 마련된 보호제도를 써도 추가 피해를 막기 부족한지를 따집니다. 따라서 가림 시설이나 비공개 심리로도 해결되지 않는 지점을 짚어야 합니다. 배심원이 다수이고 평의를 거친다는 절차 자체가 노출 범위를 넓힌다는 점이 그 예입니다. 법정에서 보호를 받는 방법은 재판절차(법원)에 단계별로 정리돼 있습니다.
통념으로 판단한 재판이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배심원의 통념이 위험한 이유는, 법관조차 통념에 기대면 사건이 뒤집히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친구에게 당한 준강간 사건이 그 예입니다.
피해자는 남편과 가해자가 함께한 술자리에서 평소 주량을 넘겨 마신 뒤 안방에서 의식을 잃었고, 눈을 떠 보니 가해자가 몸 위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남편이 상처받을까 봐 곧바로 말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고소했는데, 1심은 피해자 측 사실관계를 충분히 살피지 않은 채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가해자가 친구 집에서 그런 짓을 벌였을 리 없다는 통념이 그대로 판결이 된 것입니다.
심앤이는 항소심에서 공판검사에게 추가 증인신문을 요청해 피해자가 다시 법정에 서게 했고, 1심 판결의 사실오인과 법리오해를 조목조목 반박한 의견서를 제출했습니다. 가해자가 왜 그런 일을 벌였겠느냐가 아니라 피해자가 어떻게 그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겠느냐를 보아 달라고 짚었습니다. 항소심은 경험하지 않고는 진술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판단해 징역 4년을 선고했습니다(사건 보기).
법관도 이랬습니다. 사건 기록을 읽지 않고 법정에서 본 장면만으로 판단하는 배심원 앞에서 같은 공격이 반복된다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벌어진 피해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되는지는 준강간·준강제추행에 정리돼 있습니다.
국민참여재판을 막아 낸 사건
거리에서 처음 만난 남성에게 당한 준강간 사건입니다. 피해자는 귀갓길에 차로 데려다주겠다며 접근한 가해자를 친구와 함께 따라갔고, 가해자의 방에서 술을 더 마시다 만취해 잠들었습니다. 몸을 만지는 느낌에 깼지만 취한 상태여서 밀어내지 못한 채 피해를 입었고, 다음 날 아침 곧장 해바라기센터를 찾아 신고했습니다.
가해자 측은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습니다. 스스로 따라 들어가 함께 술을 마셨다는 정황을 앞세워 배심원에게 피해자를 의심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심앤이는 익명의 다수 앞에서 진술할 때 피해자가 받을 시선과 편견, 그로 인한 2차 피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성범죄 피해자에게 국민참여재판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법적으로 밝혀 이를 막아 냈습니다. 이어 증인신문 대비에 집중한 결과 가해자는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법정에서 구속됐으며, 취업제한 3년과 성폭력 치료강의 40시간도 함께 부과됐습니다(사건 보기).
재판 내내 이어지는 공격과 소문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는 2차 가해·보복범죄 대응에서 함께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가해자가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미 결정된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법은 성폭력범죄 피해자의 의사를 배제 사유로 적어 두었고, 남은 일은 그 의사를 기한 안에 이유와 함께 서면으로 내는 것입니다. 기소 통지를 신청해 두고, 가해자의 신청 사실을 확인하는 즉시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자주 묻는 질문
관련 실제 사례
심앤이가 실제로 대리한, 이 주제의 사건 기록이에요. 결과는 사건마다 달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