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으로 임신이 확인됐을 때 먼저 아셔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임신을 유지할지 중단할지는 피해자 본인이 정합니다.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자기낙태죄 조항과 의사낙태죄 조항은 2021년 1월 1일부터 효력을 잃었고, 그 뒤로 임신을 중단한 여성을 처벌할 근거는 없습니다. 둘째, 응급 처치와 증거 채취에는 시간이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국회는 헌법재판소가 정한 시한을 넘기고도 대체 입법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처벌 조항만 사라지고 시기와 절차, 비용을 정한 기준은 없는 상태가 5년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공백의 부담은 전부 피해자가 지고 있습니다. 어느 병원이 진료를 하는지, 비용이 얼마인지, 어떤 서류를 요구하는지를 피해자가 직접 알아보고 다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지금의 법 상태를 조문별로 정리하고, 피해 직후 시간대별로 해야 할 일과 응급피임약에 관한 공식 안내, 의료비 지원 절차, 임신과 관련된 자료를 증거로 남기는 방법, 그리고 임신으로 생긴 피해를 가해자에게 묻는 방법을 순서대로 다룹니다.
임신중지는 지금 처벌되지 않습니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11일 임신한 여성을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제1항과 의사를 처벌하는 제270조 제1항 중 해당 부분에 대해 헌법불합치를 선언하면서, 2020년 12월 31일까지 개선 입법을 하라고 정했습니다(2017헌바127). 국회는 그 시한을 지키지 않았고, 두 조항은 예정대로 효력을 잃었습니다.
결정 요지 - 위 조항들은 2020년 12월 31일을 시한으로 입법자가 개정할 때까지 계속 적용되고, 그때까지 개정되지 않으면 2021년 1월 1일부터 효력을 상실한다는 것이 결정의 내용입니다.
| 조항 | 지금 상태 | 피해자에게 뜻하는 것 |
|---|---|---|
| 형법 제269조 제1항(자기낙태) | 2021년 1월 1일 효력 상실 | 임신을 중단한 여성 본인을 처벌할 근거가 없습니다 |
| 형법 제270조 제1항 중 의사 부분 | 2021년 1월 1일 효력 상실 | 의사의 시술을 그 조항으로 처벌할 수 없습니다 |
| 모자보건법 제14조 | 개정 없이 그대로 |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한 임신 등 허용 사유와 동의 요건 문언이 남아 있습니다 |
| 대체 입법 | 시한이 지나도록 없음 | 시기·절차·비용을 정한 기준이 없습니다 |
표의 세 번째 줄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모자보건법 제14조는 의사가 일정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 본인과 배우자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고, 그 사유 가운데 제3호가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입니다. 이 조문은 처벌 조항이 살아 있을 때 처벌을 면하게 해 주던 예외 규정이었습니다.
처벌 조항이 사라진 지금 이 예외에 해당하는지를 따질 실익은 크게 줄었습니다. 다만 조문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실제로 어떤 서류를 요구하는지는 병원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진료 전에 의료기관이나 해바라기센터에 확인하시는 편이 확실합니다.
국회는 무엇을 방치했습니까?
대체 입법이 없다는 것은 피해자에게 세 가지 부담으로 돌아옵니다. 첫째, 진료 가능 여부가 병원의 선택에 맡겨져 있어 피해자가 여러 곳에 전화를 돌려야 합니다. 둘째, 비용의 기준이 없습니다. 셋째, 임신 주수에 따른 절차가 법으로 정리돼 있지 않아 설명이 기관마다 엇갈립니다.
결정이 나온 지 7년이 지났고, 국회가 스스로 부여받은 시한을 넘긴 지도 5년이 넘었습니다. 그사이 임신 사실을 확인한 피해자들은 수사와 재판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진료할 병원을 스스로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처벌하지 않겠다는 결정만 있고 지원하겠다는 제도는 만들지 않은 상태가 공백의 실체입니다. 이것은 견해가 갈리는 문제가 아니라 입법부의 직무 유기입니다.
성폭력 피해로 임신했을 때 무엇부터 합니까?
피해 직후라면 씻거나 옷을 갈아입기 전에 해바라기센터로 가시는 것이 먼저입니다. 성평등가족부의 해바라기센터 안내에 따르면 위기지원형과 통합형 센터는 365일 24시간 운영되고, 증거 채취를 위한 응급키트 조치와 산부인과·정신건강의학과·응급의학과 전문의 진료를 함께 제공합니다. 시간이 이미 지났더라도 진료와 상담은 그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
| 시점 | 해야 할 일 | 가는 곳 |
|---|---|---|
| 피해 직후 | 씻거나 옷을 갈아입기 전에 이동, 입었던 옷 보관 | 해바라기센터 |
| 72시간 이내 | 응급키트에 의한 증거 채취, 산부인과 진료 | 해바라기센터·전담의료기관 |
| 월경 예정일 전후 | 출혈이 이상하거나 월경이 늦어지면 임신 여부 확인 | 산부인과 |
| 진료 때마다 | 진단서·진료기록·영수증 원본 보관 | 의료기관 |
두 번째 줄의 72시간은 해바라기센터가 공식 안내에서 밝힌 기준입니다. 피해가 발생한 때로부터 72시간, 곧 만 3일이 넘지 않았다면 가능한 한 빨리 방문하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포기하실 일은 아닙니다. 몸에서 채취하는 증거만 증거인 것이 아니고, 진료 기록과 상담 기록, 주고받은 메시지가 모두 사건을 뒷받침합니다. 남길 수 있는 자료의 목록은 증거가 없는 경우에 항목별로 정리돼 있습니다.
응급피임약은 언제까지 복용해야 합니까?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의약품 안전사용 매뉴얼은 긴급피임약을 성교 후 가능한 한 빨리 복용할수록 효력이 높다고 안내하면서, 12시간 이내 복용을 권장하고 늦어도 72시간 이내에 복용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매뉴얼은 이 약이 성폭력이나 피임 실패와 같은 경우에 한시적으로 쓰는 약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주의할 점도 함께 안내돼 있습니다. 긴급피임약은 일반적인 피임법보다 실패율이 높아 복용했더라도 임신될 수 있고, 월경 예정일에 비정상적인 출혈이 있거나 월경이 예정일보다 늦어지면 반드시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프로게스틴 단일 제제는 전문의약품이어서 의사의 처방이 필요합니다.
약의 종류와 복용 방법, 성병 예방을 위한 처치가 함께 필요한지는 진료를 통해 정해집니다. 이 글의 숫자는 공식 안내의 기준일 뿐이고, 실제 처방은 의료기관과 해바라기센터에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의료비는 누가 부담합니까?
법에 근거가 있습니다.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전담의료기관을 지정하도록 하고, 지정된 의료기관이 피해자 본인이나 가족, 상담소·보호시설·통합지원센터의 장 등의 요청을 받으면 상담과 치료 등 의료 지원을 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제27조).
조문 요지 -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제27조 제2항에 따른 치료 등 의료 지원에 드는 경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원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같은 법 제28조).
그래서 비용 때문에 진료를 미루실 이유가 없습니다. 지원의 범위와 신청 방법은 센터와 지역에 따라 다르므로, 해바라기센터에 사건 경위를 설명하고 어떤 항목이 지원되는지 먼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지원을 받으려면 진료비 영수증과 진단서를 모아 두셔야 하고, 이 자료는 뒤에서 볼 손해배상 청구에서도 그대로 쓰입니다.
임신 사실이 사건의 증거가 됩니까?
임신은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객관적인 자료입니다. 다만 그 자체로 강간이나 준강간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어서, 동의가 없었다는 점은 별도로 다퉈집니다. 그래서 기록은 두 갈래로 남겨야 합니다. 하나는 임신과 진료의 경과이고, 다른 하나는 피해 당시의 상황과 그 뒤의 연락입니다.
임신과 관련해 어떤 검체를 남길 수 있는지, 유전자 감정이 필요한 사건인지는 사건마다 다르고 의료 판단이 앞섭니다. 그 부분은 해바라기센터와 담당 수사관에게 직접 확인하시는 것이 정확합니다.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진료를 받은 날짜와 내용을 빠짐없이 남기고, 진단서와 초음파 기록을 원본 그대로 보관하는 것입니다. 성폭행 사건에서 무엇이 쟁점이 되고 어떤 자료가 쓰이는지는 성폭행에 정리돼 있습니다.
임신으로 생긴 피해는 어떻게 배상받습니까?
형사 절차와 별개로 민사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치료비와 일하지 못한 기간의 손해,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가 청구 대상이고, 임신과 그로 인한 치료는 손해의 크기를 키우는 사정으로 주장합니다.
원치 않는 임신이 배상해야 할 손해로 평가된 사건이 있습니다. 성관계 때마다 피임을 요구했는데도 남자친구가 이를 지키지 않았고, 피해자는 반복해서 성병에 감염된 끝에 중증 골반염 진단을 받았습니다. 임신까지 확인됐으나 자궁 상태가 악화돼 출산이 어렵다는 소견에 따라 계류유산을 해야 했습니다. 가해자는 처음에 치료비를 전부 부담하겠다고 했다가 말을 바꾸고 연락을 끊었습니다.
심앤이는 형사 고소 없이 민사로만 다투는 사건이라고 보고, 만남부터 감염과 임신, 치료 경과까지를 시간 순서로 정리하게 한 뒤 가해자가 책임을 인정한 대화와 진단서를 모았습니다. 치료비와 퇴사로 인한 휴업손해, 위자료를 나눠 청구했고, 조정 단계에서 피임 요구를 반복해 무시한 것 자체가 과실이라는 점을 짚었습니다. 법원은 가해자가 2,300만 원을 지급하고 기한을 넘기면 500만 원을 더 내도록 하는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습니다(사건 보기). 위자료 산정 기준과 청구 절차는 민사 손해배상에 정리돼 있습니다.
임신중절을 종용하는 연락부터 끊습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가해자가 태도를 바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과와 회유, 책임을 떠넘기는 말, 결정을 재촉하는 연락이 한꺼번에 들어옵니다. 이때 피해자가 직접 대응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대리인을 통해서만 연락하라고 통보하는 것만으로 연락의 흐름이 끊깁니다.
1년 넘게 결혼을 전제로 사귄 상대가 사실은 혼인 중이었고 불임이라는 말까지 거짓이었던 사건이 그렇습니다. 피해자는 그 거짓말 때문에 피임 없이 관계를 이어 가다 임신했고, 그 뒤로 상대에게서 임신중절을 권하는 연락을 계속 받고 있었습니다. 심앤이는 혼인 사실을 숨긴 기망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불법행위라는 점을 정리해 민사 소장을 준비하면서, 상대에게 법률대리인 선임 사실을 공식 통보하고 직접 연락과 접근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상대는 곧 이혼하지 않았고 불임도 거짓이었다고 인정하며 합의를 요청했습니다. 심앤이는 금액뿐 아니라 배우자가 상간 소송을 제기할 경우의 책임 부담, 무고·협박·명예훼손 등 역고소 금지, 위반 시 추가 지급 조항까지 설계해 합의금 1억 2천만 원으로 사건을 마무리했습니다(사건 보기).
임신을 유지할지 중단할지는 가족도 가해자도 병원도 대신 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법 상태에서 그 결정에 형사책임이 따라붙지 않는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서두르셔야 하는 것은 결정이 아니라 진료와 기록이고, 결정에 필요한 시간은 피해자의 몫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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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앤이가 실제로 대리한, 이 주제의 사건 기록이에요. 결과는 사건마다 달라요.